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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
태위가 이전에 경주자사로 있을 때, (분양군왕으로 봉해진 곽자의가 부원수의 직책으로 포 지방에 있었고, 그 왕의 아들 희는 상서가 되어 (이때 곽희는 좌상시였으며, 유종원이 상서라 한 것은 아마도 전해들은 것이 잘못 되었을 것이다 행영·절도사를 겸임해 빈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군졸들이 방탕무뢰한 것을 내버려 두었다.
빈주사람 중에 포악을 일삼는 자들이, 마침내 뇌물을 써서 군대 안으로 이름을 고쳐 올리니, (명단 중에 이름을 섞이게 했으니, 제멋대로 굴어도, 관리는 추궁할 수 없었다. 날마다 떼지어 다니며 시장에서 구걸해(졸라서 빼앗는데, 만족하지 않으면, 번번이 분격하여 사람들의 손발을 때려 부러뜨리고, 가마솥· 발달린 솥· 술이나 물을 담는 항아리·동이 들을 몽두이로 부숴서 길에 가득 쌓아놓고, 팔을 걷어 부치고 건들건들 다니면서, 애를 밴 부인을 쳐 죽이기에 이르렀다. 빈녕 절도사 백효덕은 분양왕이라는 배경 때문에, 근심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태위는 경주에서 이 실상을 적은 문서로 부에 보고하고, 이 일을 상의하기를 원하여, 찾아와 말하길 : “천자께서 당신께 백성을 다스리도록 맡기셨는데, 당신께서는 백성들이 가혹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시고도, 의연히 태평하시니, 장차 큰 난이 일어나면, 어쩌시렵니까?” 하니 효덕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라고 했다.
태위가 말하길 : “저는 경주를 다스리는데 매우 편안하니 일이 적고, 지금 백성들이 외적이 쳐들어오는 난리가 없는데도 불시에 죽어가며, 천자의 변경 일을 어지럽히는 것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만일 저를 (군의 집법관인 도우후로 임명해 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난을 그치게 하고, 당신의 백성들이 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효덕이 말하길 “(그렇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며 태위의 청에 따랐다.
이미 임명한지 한 달이 지나, 곽희의 군사 17명이 시장에 들어가 술을 빼앗고, 또 술독을 칼로 찌르고, 술 빚는 기구를 무너뜨려, 술이 도랑으로 흘러가 버렸다. 태위는 군졸을 풀어 17명을 잡아, 모두 머리를 잘라 긴 창 끝에 꽂아서, 시장 문 밖에 꽂아두었다. 곽희의 모든 군영은 대단히 소란스러워졌고, 모두 갑옷을 입었다.
효덕은 두려워 벌벌 떨며, 태위를 불러 말하길 :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태위가 말하길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사들에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효덕은 수십명으로 하여금 태위를 따르도록 했으나, 태위는 다 사양하여 돌려보내고, 차고 있던 칼을 풀고, 늙고 다리를 저는 한 사람을 골라 말을 끌게 해, 곽희의 군영 문가에 이르렀다.
갑옷을 입은 자가 나오자, 태위는 웃으면서 들어가며 말하길 : “늙은 군졸하나 죽이는데, 어째서 갑옷을 입었는가? 내가 내 머리를 갖고 왔네.” 라고 하자, 갑옷 입은 자가 깜짝 놀라하니, 훈계하기를, “상서께서 일찍이 너희들을 저버렸느냐? 부원수께서 일찍이 너희를 저버렸느냐? 어찌 난리를 부려 곽씨 집안을 망하게 하려 하느냐? 상서께 나오셔서 내 말을 들으시라고 일러라.” 하자 곽희가 나와 태위를 만나보았다.
태위가 말하길 : “부원수의 공로가 천지에 가득하니, 마땅히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상서께서는 군졸들이 포악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는데, 포악함은 장차 난리를 일으키고, 천자의 변방에 난리가 일어나면,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려는 것입니까? 그 죄는 부원수께 미칠 것입니다. 지금 빈주 사람 중에 못된 자제들이 뇌물을 서서 군대의 명단에 이름을 고쳐 올리고는, 사람들을 죽이고 해치는데, 이와 같은 것이 그치지 않으면 얼마못가 큰 난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큰 난리는 상서로부터 나온 것이며, 사람들은 모두 상서께서 부원수에 기대어 군사들을 거두어 통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곽씨의 공명이 장차 남아있을 만한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희가 재배하며 말하길 : “당신께서 다행이도 저를 올바른 길로 깨우쳐주셔서, 그 은혜가 심히 막대하니, 군사들이 가르침을 따라 받들어 모시기를 원합니다.” 하며 돌아보며 좌우로 꾸짖어 말하기를 : “모두 갑옷을 벗고, 해산해 대오로 돌아가라. 감히 소란을 피우는 자는 죽으리라.”
태위가 말하길 : “제가 아직 저녁식사를 못했습니다. 청컨대 잠깐 거친 식사라도 차려주셨으면 합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말하길 : “제가 몸이 좀 불편하니, 문하(군영에서 묵었다 갔으면 합니다.” 말을 끌던 군졸에게 가서 다음날 오라 명하고는, 곧 군중에서 누워 잤다. 곽희는 옷도 벗지 않고, 보초에게 딱다기(야경을 돌때 사용하는 나무를 치며 태위를 지키라고 엄명했다. 다음날 아침, 함께 효덕의 처소에 와서, 그동안 잘 못했던 것을 사과하고, 잘못을 고치겠노라 아뢰었다. 빈주는 이로 인하여 화근이 없어졌다.
이에 앞서 태위가 경주에서 영전관으로 있을 때였다. 경주의 대장 초령심이 백성들의 전답을 빼앗아, 자신이 수십 경을 차지하고, 농민에게 소작으로 주며 말하길: “장차 수확을 거두면 나에게 반을 돌려줘야 한다.” 했는데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어 들에는 풀 한포기 나지 않자, 농부가 이를 심에게 알렸다. 심이 말하길: “나는 들여올 곡식 수만 알 뿐이지, 가뭄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더욱 다급하게 독촉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르고, 갚을 길이 없자, 곧 태위에게 알렸다.
태위가 실상을 판결한 문서를 씀에, 말을 매우 부드럽게 써서, 사람을 시켜 심에게 알리도록 했다. 심은 몹시 화를 내며, 농부를 불러 말하길: “내가 단 뭐라는 사람을 두려워할 줄 알았느냐? 어찌 감히 내말을 했느냐!” 하며 판결문을 농부의 등 위에 깔고, 곤장으로 스무대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는, 수레에 실어서 뜰 안에 내려놓았다.
태위가 몹시 울면서 말하길: “내가 너를 곤경에 빠지게 했구나” 하며 곧 스스로 물로 피를 씻기고 옷을 찢어서 상처를 감싸고, 손수 좋은 약을 바르고, 아침, 저녁으로 자기가 농부에게 음식을 먹인 후에야 밥을 먹었다. 타던 말을 팔아, 곡식을 사서 대신 갚아줌에, 알지 못하게 했다.
(당시 경주에 임시 주둔해 있던 회서 군대의 장군 윤소영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심을 찾아가 심하게 욕하며 말하길: “네가 진정 사람이더냐? 경주의 들판은 가뭄으로 붉은 땅처럼 되었고,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인데, 기필코 곡식을 받아 내려하고, 또 곤장으로 죄 없는 자까지 때리다니, 단공(단수실은 인자하고 믿음 있는 대인이거늘, 너는 공경할 줄을 모르다니. 지금 단공은 오직 한 마리 있는 말을 헐값에 팔아서, 곡식을 사서 너에게 주었는데, 너는 또 그것을 받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구나. 무릇 사람됨이, 천재를 우습게 알고, 대인을 무시하고, 죄 없는 사람을 때리고, 또 인자한 사람의 곡식을 빼앗으면서, 주인으로 하여금 외출할 때 말도 없이 다니게 하니, 네가 장차 어찌 세상을 보겠으며, 또한 노예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니, 심이 비록 흉악하고 거만하지만, 말을 듣자 너무 부끄러워 땀을 흘리고 밥도 먹지 못했으며, 말하길: “나는 끝내 단공을 볼 수 없으리라.” 어느 날 저녁 스스로 한탄하며 죽었다. (사실 이때 죽지는 않았다고 함
태위가 경주에서 사농으로 부름을 받음에, 그 가족들에게 경고하기를: “기 지방을 지날 때, 주자가 행여 뇌물을 주면, 절대로 받지 마시오.” 라고 했다. 기를 지날 때가 되어, 주자가 정말 훌륭한 비단 300필을 가져왔는데, 태위의 사위 위오가 굳이 거절했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도성에 이르러, 태위가 노하여 말하길 : “기어이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사위 오가 사죄하며 말하길: “제 지위가 낮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태위가 말하길: “그러나 죽어도 우리 집에는 둘 수 없다.”하여 사농 관청에 가서, 대들보 위에 두었다. 주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태위가 죽었다. 관리가 이를 주자에게 알려 주자가 내려보니, 옛날 봉함과 표지가 그대로 갖춰 보존되어 있었다.
태위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은 우측에 쓴 바와 같다. (옛날에는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으므로 이미 쓴 바는 오른쪽에 있음을 말함
원화9년 모월모일, 원외에 설치된 정식관원과 같은 지위의 영주사마(영주사마라는 관직은 정원 편제 이외로 설치한 관직으로 편내 정식관원과 지위는 같았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음 유종원이 사관(역사를 편수하는 기관에 삼가 올립니다. 지금 태위가 매우 절개 있는 자라 일컬어지는데, 대체적으로 일개 무인이 죽음을 생각치 않고 한때 분격해, 이로써 세상에 명성을 얻고자 했다 라고만 여겨지니, 태위가 뜻을 세운 바의 이러한 것들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일찍이 기·주·빈·태 사이를 왕래했으며, 진정을 지나고, 북으로는 마령에 이른 적이 있고, 변방 요충지의 보루들을 거치면서 몰래 늙은 장교나 퇴역한 군졸들에게 잘 묻곤해서 그 일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태위의 사람됨은 온화하고, 항상 머리를 숙이고 (공경하는 태도로 두손을 가슴께에 맞잡고 걸어 다녔으며, 말투는 겸손하고 약했으며, 일찍이 (오만한 얼굴빛으로 사람을 대해 본적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유자(고상하고 우아한학자라 했습니다. 불합리한 일을 만나면, 반드시 그의 뜻을 이루게 했으니,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마침 영주자사 최공께서 오셨는데, 말씀이 신실하시고 행동이 정직하셔서, 태위의 누락되었던 사적에 대해 죄다 들을 수 있었는데, 다시 비교해보아도 틀림없습니다. 혹 아마 아직 산실된 사료로 사관께서 모으지 못하셨을까 감히 이 글로써 사사로이 집사(공경하는 칭호로 당시 사관인 한유께 보냅니다. 삼가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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